오후 들어서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5시를 즈음으로 그쳤다. 지난해까지 같이 회사에 다니다가 일을 그만두고 청주로 내려간 선배를 만나러 가기로 한 날이다.
5시 교육을 마치고 숙소를 향하는 길에 뭔가 눈에 띈다. 달팽이 두 마리다. 비에 몸을 피해 움직이다가 아스팔트 도로 위로 올라온 모양이다.
구름에 숨어 있던 태양이 다시 떠올라 거무튀튀한 아스팔트 위로 달팽이의 고단한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. 기어가던 두 마리가 몸을 부딪히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.
청주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 대신 대청호길로 차를 몰았다. 비 개인 뒤 호숫가는 혼자 드라이브하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아름답다. 깨끗한 공기 덕에 멀리 산봉우리가 보이고 호수에 비친 나무와 봄꽃은 방금 전까지 폐 깊숙이 마신 먼지까지 깨끗이 씻어주는 듯하다.
청주와 대전 중심지의 중간 정도되는 동네, 청남대로 가는 셔틀 버스 승강장 덕에 식당 몇 곳이 성업 중인 작은 동네에서 선배를 만났다. 그 동안 산 이야기, 함께 일하던 동료들 소식을 나누었고, 현재 내가 배우는 일과 숙소의 눈코입이며, 팬션왕이며, 큰형님이며, 다시멸치씨 같은 캐릭터 이야기를 해주었다. 캐릭터를 잡지 못하고 있지만 어설프게 친정부주의자 서울 깍쟁이가 될 뻔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.
밥을 먹고 오랜만에 밥보다 비싼 커피를 마셨다. 카푸치오에 올라가는 계피를 굳이 시나몬이라고 부르는 졸속들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기억도 나고, 날 보고 꼬마곰 젤리 같다던 친구도 생각이 난다. 곰 한 마리를 골라 거품 목욕을 즐기게 했더니 자꾸만 자맥질이다.
과거를 잊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만 보고 있으면 가끔은 두고 온 것들이 그립기도 하다. 아쉬움이나 미련은 아니다. 경력을 버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. 일을 하다보면 오랜 시간 익혔던 것들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 남은 삶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는다. 마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다.
IT 기술을 접목해도 좋고, 나만이 만들 수 있는 콘텐츠를 건축에 더하는 것도 방법이겠다. 어떤 쪽이 더 나은 방법인지는 새로운 경력을 쌓으며 판단할 문제일 것이다.
느리기로서는 비교할 데 없고, 손톱보다 작은 달팽이조차 해질녁에는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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